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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2024 양산원동매화축제 원동면 이야기 모음

by 요블 2024. 4. 2.

지난 3월 9일 양산원동 매화축제장에 가로수에 묶인 현수막들을 보았다. 축제장 안내 현수막인 줄 알았으나 한두개가 아니고 여러개가 걸려있다. 원동면은 매실과 딸기를 많이 생산하는 농촌이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령화가 되면서 어르신들이 많이 계시고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뵌 적이 없고 할머니도 어렸을 때 봐서 기억이 없지만 외가댁에 가면 작은 농사를 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보며 시골에서 놀았던 추억이 있다. 이 현수막은 그런 원동면 여러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그 하나하나를 다 찍으며 읽어보았다.

 

원동면 이야기 늘밭마을편

문정애(늘밭마을)

결혼식은 부산에서 하고 시집이라고 처음 늘밭마을에 오는데 호롱불이 빨갛게 보이면 동네더라. 인도도 없어서 일반차도 못 올라갔다. 산에 숯 구우러 다니는 차 타고 중간에 내려가 마을까지 걸어왔다. 새신부 온다고 호롱불 켜놓고 짚을 길에 깔아놨더라. 다리도 없어가 도랑도 업어서 건너고, 이런 시골이 다 있나 싶었데이.

배기정(늘밭마을)

내 젊었을 때 늘밭마을은 일터였다. 원동이나 함포, 선장에 셋방살이를 하면서 늘밭까지 필요한 물건들 지게에 지고 와서 애 업고 논매고 밭 갈았지. 30리를 걸어서 출퇴근했다. 한 번 가는데만 2~3시간 걸렸지. 지게에 짚이라도 지고 가는 날이면 짚물이 속옷까지 노랗게 들고 고무신 신고 걸으면 막 발에 눌러 붙고 그랬다.

늘밭마을

 

원동면 이야기 토교마을편

박덕수(도교마을)

충청도에서 원동으로 왔지. 친구가 돈 벌러 오라고 해서 왔다 아이가. 철광 일 하고 5년 있다가 폐광이 되더라고. 그래서 원동에 가족들 두고 굴 뚫는데는 어디든 다 돌아다녔다. 그래 떠돌아도 여기가 고향이다.

임종덕(토교마을)

폭발 기술자였지. 철광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진폐증 걸려 죽는 것도 많이 봤고, 나도 죽을 고비 여럿 넘겼지. 돌 조각이 떨어져서 머리도 찍히고 그랬다. 그래도 물금 철광이 내 밥줄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 그땐.

토교마을

 

원동면 이야기 태봉마을편

예문호(태봉마을) 

원동에 산 지 15년 정도 됐지. 서예도 하고 노후 생각해서 태봉마을 왔는데 와보니까 참 좋은 거라. 조용하기도 하고 공기 좋고 환경 좋고 특히 인심이 최고더라고. 평생을 이렇게 좋은 태봉마을에서 살지 싶다.

윤수연(태봉마을)

호롱불 켜고 살면서 배 곯다가도 정월대보름이면 배 부르게 먹었다 아이가. 마을 사람들 다 모여가지고 달집도 태우고 애들은 짚불도 태우고 풍물도 치고 오곡밥 칠밥 조밥도 해 먹고 소고기국도 끓여 먹었다 아이가. 밤새껏 그리 놀고 느랬지.

태봉마을

 

원동면 이야기 선장마을편

김귀남, 최진식(선장마을)

결혼하고 나서는 산에 가서 칡 캐고 열매 따고 그게 일이었다. 우린느 숯 없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숯을 꾸버가 원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 범일역까지 가서 숯을 팔았는데 새벽에 해가 뜨기도 전에 삼태별을 시계 삼아보고 장사하러 갔지. 한 시간씩 비포장 길을 걸었는데 그 길이 어찌나 먼지. 한없이 걸었던 것 같다. 

김순남(선장마을)

요즘에 옷은 다 사입는데 옛날에는 목화가지로 물레 돌려서 실 뽑아가 길쌈으로 베를 짜서 옷을 지어 입었다 아이가. 옷을 지어 놓으면 그걸로 끝이 나나. 밤이면 늘 빵꾸난 옷 꼬메기 바빳고, 하루가 어쨰 지나가는 지도 모르게 지나가더라.

선장마을

 

원동면 이야기 장선마을편

신을창(장선마을) 

내 24살에 장선마을로 시집왔는데 이렇게 골짜기인줄 알았으면 시집 안 왔다. 시집올 때 차를 타고 오는데 석남사까지 밖에 안오더라고. 그때는 차고 나무 싣고 다니는 트럭밖에 없었다. 그 차를 타고 석남사에 내려갖고 걸어노는데 어찌나 골짜기인지 진짜 놀랬다 아이가.

오귀남(장선마을)

결혼하고 좀 있다가 하동에서 원동으로 왔지. 소작하러 왔어. 남의 논에서 나락농사 지어 ㅁ거고 수확한 거 다 떼주고, 그리 살다가 자리를 잡았지. 힘들게 먹고 살았던 동네긴 하지만 그대로 그 시절 같이 보낸 친구들이 여기 있으니까 내 평생 여기서 있다 가지 않을까 싶다.

장선마을

 

원동면 이야기 중리마을편

시어머니에 시할머니까지 계셨느데 시집오자마자 신랑은 군대 갔고, 그래서 어른들 따라 다니면서 딸기 키우는거 배우고 그랬지. 힘들긴 했는데 인심이 좋아 여기 계속 살았다. 옛날에 장삿꾼들 와도 밥은 꼭 해먹여서 장삿꾼들도 좋아하는 마을이었거든. 그래서 여적까지 살고 있다 아이가. 

허춘자(중리마을)

스물에 시집왔는데 시집 와서는 내내 울었다. 식구가 열 넷어었거든. 식구는 많지 일은 할 줄 모르제, 보립바도 할라몀ㄴ은 두 번씩 해야 한다. 보리를 많이 넣으면 한 번에 밥이 잘 안되거든. 그러니 얼마나 일찍 일어나야겠노 쌀은 한 웅큼만 넣고 보리를 느리 많이 넣고 밥을 해뭇다.

중리마을

 

원동면 이야기 외화마을편

 

김정숙(외화마을)

남편이 물금 광산에서 일했거든. 퇴근하면 같이 두부를 만들었다. 난 낮에 두부를 팔러 다녔지. 콩 두 되로 두부 12모를 만들거든. 그걸 들고 다님녀서 마을 가게에도 팔고 비지도 팔아서 결혼한 지 20년 만에 집을 하나 샀지. 지금도 거기거 살고 있아. 특별한 집이지.

박수열(외화마을)

젊었을 때에는 방앗간에서 일해주고 먹고 살았지. 떡 배달도 하고, 그리고 남의 일 계속 해주면서 그리 살았지. 마을이 따뜻하고 좋으니 여길 못 떠나겠더라고. 그래서 지금도 여기서 살고 있다 아이가.

외화마을

 

원동면 이야기 내화마을편

이도일(내화마을)

내 어릴 떄만 해도 환갑잔치를 많이 했지. 그때는 환갑이면 노인이었거든. 자식들이 좀 잘사는 집은 돼지 한 마리씩 잡고 돼지머리 하나 올리고, 고기하고, 떡하고 술하고 그래가지고 동네 사람들 대접하고 그랬지. 워낙 못 먹고 살던 시절이니까 그런 날이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좋았지.

이춘애(내화마을)

스물 여덞에 시집을 왔는데 처음 이 마을 올 때는 길이 포장도 안되어 있고 아이고마 설악산 오는 것 같더라. 시집 온 이듬해부터 노지 딸기를 했는데 부산에 팔러갔거든. 여기서 이고지고 33kg을 물금역까지 걸어가 장에 가니까 목이 쑥 들어가더라.

내화마을

 

원동면 이야기 원포마을편

장민호(영포마을)

영포마을에서 나고 자랐는데 내 자랄 때에는 농사 지어가 수확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길 수가 없었다. 11월에 쌀 수확하면 그걸로 1년을 먹고 사는데, 그것도 없을 때가 많았지. 이 골짜기에서 진짜 먹고 살라고 나락동사, 딸기농사, 매실농사, 미라니농사, 안 해본 농사가 없다.

최충열(영포마을)

원동이 나고 자란 내 고향이지. 지금은 매실농사 짓지만 예전에는 나락농사 지었다. 옛날에는 수확량도 적고 팔기도 어려웠지. 수확한 쌀 100kg씩 리어카에 싣고 새벽에 나서가 두 시간씩 끌고 가서 팔았다. 보통 일이 아니었지.

영포마을

원동면 이야기 어영마을편

류옥임(어영마을)

그 시절에 우린느 연애 결혼을 했지. 부산 직장에서 남편 만나가 얼음 장사, 복국 장사하다가 20년 전에 남편이 내 고향에서 호강시켜 주꾸마 해서 원동으로 들어왔다 아이가. 처음에는 남편 고향이었지만 인제는 친구들도 많고 해서 인자 내 고향 같다.

백옥자(어영마을)

옛날에는 초상도 집에서 쳤고 혼사도 집에서 했지. 누구 집 혼사 치르는 날이나 명절에는 푸지게 먹었다. 다 같이 술도 먹고 고기도 먹고 장두고 끋고 전축이나 라디오 틀어놓고 그 노랫소리에 춤도 추고 그랬지. 그 때 생각하면 지금도 신이 나네. 진짜 재미있게 놀았다.

어영마을

원동면 이야기 신곡마을편

심을분(신곡마을)

나는 농사를 짓고 우리 시어머닌느 그걸 갖다 팔았지. 고구마를 농사 지어가지고 36kg을 머리에 이고 걸어서 팔러 갔거든. 어머님이 울면서 이고 갔다더라. 못내려놔서. 한 번 내리면 그걸 다시 들어서 머리에 이어 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으니 죽으나 사나 이고 안갔나.

이을수(신곡마을)

80년도 쯤에 딸기 농사를 지었는데 그 시절에는 하우스도 전부 대나무로 대를 세웠지. 근데 문제가 추울 때 덮을 거적대기인데, 신곡마을은 논농사를 안 지어가지고 짚도 없었어. 거적대기 만들 짚 찾으러 다닌다고 다른 마을에도 엄청 찾아다녔지. 그래 짚을 얻어오면 그걸 또 엮는다고 한 세월이었다.

신곡마을

 

원동면 이야기 범서마을편

박학선(범서마을)

결혼해서 첮 아이 낳아서 여길 왔지. 처음에 여기 왔을 때 진짜 낯설대. 거기다가 밭을 살라고 하다가 계약금도 띠고 진짜 거지가 다 됐었다. 그떄 남의 밭일부터 하고, 농사 지어가지고, 애들도 키웠다 아이가.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했나 싶다.

정석순(범서마을)

눈만 뜨면 일을 해야 했지. 소 한마리 키우면서 그걸로 농사 다 지었다. 근데 여긴 모 심어 놓으니까 물 들고 뭘 심어 놓으면 또 물 들고 그래서 물 안드는 토지 찾는 게 일이었다. 틈틈히 상추 침고 팥 심은 거 그거 수확해서 물금장에 이고 지고 가서 팔고 다 그리 살았지.

범서마을

원동면 이야기 당곡마을편

배말순, 이우량(당곡마을)

당곡마을이 저지대라 낙동강 물이 맨날 차고 들어왔거든. 그래서 뭔 작물을 못키워. 이 마을에서는 처녀가 나면 시집갈 때까지 쌀서말을 못 먹고 간다 그랬어 우리는 둘 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지. 그래서 우리 환경에서 그나마 키울 수 있는 딸기를 시작했다 아이가. 우리가 원동 딸기 첫 세대였다.

이태권(당곡마을)

나는 고기도 잡았지. 농사도 지으면서 많이 잡을 때에는 하루 400kg도 잡았다. 낙동강에서 배타고 다니면서 잉어, 붕어 참 마이 잡았다. 잡아 놓으면 아지매들이 다라기 갖고 사러 오거든 그러면 아지매들이 마을마다 다니면서 생선 팔러 다녔다 아이가. 

당곡마을

원동면 이야기 원동마을편

노명수(원동마을)

남편 고향이 원동이라 50년 전에 여길 왔지, 남의 일도 하고, 나물 같은거 캐다 팔고 산에 가서 풀 뜯어서 팔고 양산장에도 가고, 구포장도 가고, 원동장도 가고 진짜 닥치는 대로 오만 거 다 하고 살았데이.

정말자(원동마을)

여기는 내 고향이자 남편 고향이거든. 울릉도, 부산, 대저 오만데 돌아다니면서 살아봤지만 여기만한 데가 없더라고. 사람도 좋고 친구들도 좋고 뭐던 심굴수도 있고, 인자는 교통도 편하잖아.

원동마을

원동면 이야기 함포마을편

이선옥(함포마을)

스무 살에 시집와서 보리도 키우고 콩도 키우고 했는데 농사가 고되긴 하지만 그래도 키우는 재미가 있더라고 이제는 도시에서는 지겨워서 못살겠다. 마 여가 재미도 있고 인심도 좋으니까 살기 편한기라.

정복술(함포마을)

시집 온 그 해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거든. 3살짜리 시누이랑 시동생들이 남았어. 그래가 시누이도 시동생도 내가 키웠다. 시누인느 죽을 때까지 내보고 엄마라 카데 그라고 4남매도 낳아서 다 키웠찌. 자식이든 시동생이든 중요하나. 잘 컸으면 됐지.

함포마을

 

원동면 이야기 명언마을편

우봉금(명언마을)

시집 오기 전에는 편하게 살았다. 근데 여기 오니까 낙동강물이 넘어가 나락농사도 제대로 몬하는기라. 비만 오면 가슴 졸였다 아이가. 그래도 나락농사나 밭농사 열심히 지었던 거는 시부모님이 안 나무라고 잘한다고 마이 말씀해주셨거든 그게 그래 힘이 되더라.

이경출(명언마을)

남편은 마을일 한다고 싸돌아댕기고 집에 일은 내가 다 했지. 나락농사도 짓고 딸기도 지었는데 근데 내는 마 속이 상해 죽겠는 거라. 그래도 시아버지가 내를 딸처럼 참 잘해주셨다. 결혼하고 10년 있다가 돌아가셨는데 아버님은 지금도 보고 싶다.

명언마을

원동면 이야기 내포마을편

김말선(내포마을)

지금은 소를 키우고 있지만 시집와서는 딸기를 키웠지. 그떄는 지금처럼 비닐하우스가 좋지도 않았다. 딸기 얼어 죽을까봐 짚으로 거적대기를 짜서 밤이면 하우스 위에다 덮어주고, 아침이면 또 그거 걷느라고 쌩고생을 다 했다. 아이고마 그 때 딸기 키웠던 고생은 말로 다 몬한다.

김선옥(내포마을)

스물 셋에 시집와서 나락 농사, 딸기 농사, 들깨 농사, 매실 농사 진짜 안 해본 게 없다. 또 농사만 어디 일이가. 그거 내가 팔아야지. 감이나 나물이나 이런걸 이고 지고 원동역까지 걸어가가 기차타고 구포장, 부산역, 범일동, 국제시장, 충무동까지 갈 수 있는데는 다 가가 팔았다 아이가. 

내포마을

원동면 이야기 대리마을편

강넘이(대리마을)

스무 살에 같은 동네에서 시집왔지. 친정이 같은 동네에 있으니까 좋은 점만 있을 줄 알았더만 나쁜 점도 있데. 내가 시래기, 고구마, 감자를 양 불릴라고 보리밥에 넣어 먹는 것도 친정 식구들이 다 알더라고. 을매나 마음이 아팠겠노.

엄차연(대리마을)

스물 한 살에 남편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왔다. 그래도 시집 식구들도 있고 이웃들도 있어가 한 번 보고, 두 법ㄴ 보고 하니 정이 들더라고. 제일 좋았던 며느리 보는 순간도 다 같이 안했나. 그 사람들이 나를 여기에 이래 오래 살게 했다.

대리마을

원동면 이야기 선리마을편

김효권(선리마을)

원래 원동에서 나서 12살까지 살았지. 근데 6.25도 나고, 먹고 살라고 부산을 안 갔나. 그라고 50년이 흐르고 나니 고향 생각이 절로 나서 10년 전에 원동으로 다시 왔다. 여기는 여전히 좋지. 부산 살 때에는 머리가 많이 아팠는데 여기 오니까 머리가 안 아픈기라. 이래서 고향이 좋은가 싶다.

배종수(선리마을)

여서 나고 자랐다. 배 곯을 때는 칡 캐먹고 쑥 캐먹고 감자 캐먹으면서 악착같이 살았지. 그래도 나락농사 짓고 사과농사 지으면서 형편이 좀 나아져가 아들 셋, 딸 셋을 부산 유학까지 보내가면서 키웠다. 지나고 나니 우째 살았나 싶다.

선리마을

원동면 이야기 신주마을편

권윤자(신주마을)

우리 마을 애들은 배 타고 학교 다녔다. 교통이 별로 안좋았으니 그때는 원동초등학교까지 배타고 다니는게 빨랐거든. 강바람이 어찌나 차가운 지 애처롭기도 하고 그랬지.

박이호(신주마을)

우리 마을은 지대가 낮고 물이 자주 들어가꼬 농사가 안 되는 기라. 그래서 난 돼지를 좀 키웠지. 멧돼지도 좀 키웠고. 여기서 돼지 싣고 가면 구포 가서 팔고, 그러면서 정미소도 했다. 그래서 왕겨같은 거랑 돼지 똥이랑 같이 섞어 거름 만들어 팔기도 했어.

신주마을

 

원동면 이야기 지나마을편

김순옥(지나마을)

명언 마을에서 시집왔는데 시댁이 못살아도 그리 못 살수가 없더라. 맨날 빛내서 보리밥 먹고 남의 논 부쳐서 살았는데 30대에 논 한 마지기를 처음 샀다. 기분이 좋아서 밤에 잠도 안 오더라.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마음이 푸근하다.

김진형(지나마을)

어렸을 때 친구들이랑 삼월 삼짓날, 칠월 칠석날에는 골짜기에 가서 밀가루 조금씩 모아서 풀빵도 구워먹고 국수도 한 움큼 가져와서 삶아 먹은 게 유일한 놀이였다. 라디오가 한 동네 하나 있을까 말까 였으니까 여름이면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모깃불 피워놓고 다 모여서 노래 듣고 연속극 듣고 그랬지.

지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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